고려 말, 공민왕은 원나라의 쇠퇴를 틈타 철령 이북 지역을 되찾았으며, 이는 고려의 영토 회복과 자주성을 강조한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공민왕 사후, 우왕과 최영이 이 지역을 유지하고자 명나라와의 충돌을 불사하며 요동정벌을 추진하게 된다. 반면, 이성계는 이를 강하게 반대하며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웠다. 이번 글에서는 철령 이북 반환의 배경, 요동정벌을 추진한 우왕과 최영, 이에 반대한 이성계의 입장과 요동정벌 반대 이유를 살펴본다.
1. 공민왕이 되찾은 철령 이북 지역과 그 배경
1) 원나라의 쇠퇴와 고려의 영토 회복
공민왕(재위 1351~1374)은 원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고려의 자주권을 회복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1356년, 그는 친원파인 기철 일파를 숙청하고, 원나라가 점령하고 있던 철령 이북 지역을 되찾아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 지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압록강을 경계로 요동과 맞닿아 있어 군사적, 경제적 가치가 컸다.
2) 공민왕 사후 철령 이북 문제
공민왕이 암살된 후, 고려의 내부 정세는 혼란스러워졌으며, 우왕(재위 1374~1388)과 최영은 공민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철령 이북 지역을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하면서 고려와 명나라 간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우왕과 최영은 요동을 선제공격하여 명나라의 군사적 압박을 해소하려는 요동정벌을 추진하였다.
2.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 추진
1) 요동정벌의 필요성 인식
우왕과 최영은 철령 이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명나라에 대한 선제공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최영은 적극적인 군사 정책을 펼치며 명나라와 대립각을 세웠고, 이에 따라 요동정벌이 결정되었다.
2) 이성계를 앞세우려 했으나 이성계의 반대
요동정벌의 주력 장수로는 고려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적 지도자로 성장한 이성계가 지목되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요동정벌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요동을 공격하는 것이 고려에 엄청난 부담을 초래할 것이라 판단하였고, 이에 ‘사불가론’을 내세우며 요동정벌을 반대했다.
3. 이성계의 요동정벌 반대 이유: 사불가론(四不可論)
이성계는 요동정벌이 고려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했다.
1)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다 (天時不利)
당시는 여름철로, 고려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많은 병력과 물자를 동원해야 했다. 여름철 장마와 질병이 창궐할 위험이 컸으며, 군사 운영에 심각한 차질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았다.
2) 지리적으로 불리하다 (地利不利)
고려에서 요동까지는 먼 거리였으며, 명나라의 방어망을 뚫고 진격하기에는 지리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또한 압록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보급로가 차단될 위험이 높아 장기적인 전투 수행이 어려웠다.
3) 백성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人心不和)
고려는 지속적인 왜구의 침략과 내부의 혼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상태였다. 백성들은 대규모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전쟁이 벌어질 경우 고려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4) 군사력이 부족하다 (軍事不備)
고려의 군대는 충분한 훈련과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으며, 명나라와의 정면 충돌을 감당하기에는 병력과 무기, 전략적인 준비가 부족했다. 이에 따라 요동정벌을 강행할 경우 전멸할 위험이 있었다.
4. 요동정벌의 결과와 영향
이성계는 ‘사불가론’을 내세우며 요동정벌을 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를 강행하려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고려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인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하였고, 이를 통해 고려 조정의 권력 구조가 급격히 변화하였다.
1) 위화도 회군과 최영의 실각
1388년 6월,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회군하였다. 이로 인해 우왕과 최영은 실각하였으며, 최영은 유배 후 처형되었다. 우왕도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고려의 권력 구조가 완전히 바뀌었다.
2) 조선 건국의 기반 마련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며, 결국 1392년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철령 이북 문제와 요동정벌은 고려가 명나라와의 외교적 갈등 속에서 혼란을 겪던 시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으며, 이성계의 부상과 고려 멸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5. 철령 이북과 요동정벌의 역사적 의의
철령 이북 반환과 요동정벌은 고려 말 명나라와의 외교, 내부 권력 투쟁, 국가 존망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 특히 이성계의 ‘사불가론’은 현실적인 군사적, 경제적 판단을 바탕으로 고려의 입장을 재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면서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철령 이북과 요동정벌은 고려 말 가장 중요한 정치·군사적 사건 중 하나로, 이성계의 부상과 고려 왕조의 붕괴를 촉진한 계기가 되었다. 고려의 운명을 결정한 위화도 회군과 이후의 정치 변화를 깊이 알고 싶다면 아래 버튼을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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