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금관 특징
금빛 찬란한 장신구들 신라는 황금의 나라이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금성이라고 부를만큼 금이 풍부한 나라였다. 우리가 보던 황금 유물들은 모두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것이다. 하일라이트는 역시 금관이다.
나무를 상징하는 장식과 사슴뿔을 상징하는 장식으로 이루어진 금관으로 전형적인 신라 금관 형태이다. 금관의 주인은 나무와 사슴을 신성시 했다. 출토될 당시 이마가 아닌 턱에 걸쳐있었던 금관은 염을 하고 나서 머리를 감싼 것이다.
신라의 금관은 실제로 썼는지 부장용(장례용품)인지는 모르지만 염을 한 뒤 관을 씌운 건 사실이다. 금관과 함께 금팔찌, 금제 허리띠, 금동 신발이 한 세트로 출되어 경주박물관에 출토 되었을때 모습을 전시한 모습이다.
금관총의 금관
금관총 유물 금 무게만 약 7.5kg으로 그만큼 금이 많았다고 볼수 있다. 이렇게 신라 유물은 도굴이 되지 않은 이유는 지하를 파고 시신과 부장품을 따로 안치후 자갈을 가득 채워 만든 무덤인데 마무리로 덮은 흙만 23m (황남대총기준)이다. 도굴하기 힘든 구조이다. 세월이 지나 무너지면 자갈무덤이 된다.
금령총 금관
1921년 경주 노서동에서 가옥 공사 중 집을 짓기 위해 지하실을 파다가 우연히 금관이 출토되면서 금관총 금관이 발굴되었다. 금관총 금관에 이어 추가로 발견된 금령총 금관이 발굴되었는데 금관에 방울이 달려 있어 금령총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서봉총 금관
1926년에는 경주역 기관차고 건축에 흙이 필요해서 공사담당자들이 신라 무덤에서 흙을 가져오자고 퍼다쓰다가 또 다시 금관이 발견 그것이 서봉총 금관이다.
1926년 전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신혼여행을 한국으로 왔는데 그는 고고학자 출신이었다. 그래서 경주에 유물발굴 소식에 경주로 온것이였고 그가 금 허리띠를 발굴했다. 그래서 서봉총의 이름은 스웨덴의 한자어가 서전이고 금관 끝에 봉황이 달려 있어서 스웨덴 서, 봉황 봉, 무덤 총으로 서봉총이다.
그 후에 발굴된 금관을 평양 박물관에 전시하게 되었는데 당시 일본 고이즈미 관장이 금관을 들고 기생집에 들렸고 술에 취해서 평양 기행에게 씌워본 것이다. 이것이 신문에 났다. 이런 만행으로 고이즈미 관장은 파직되었다. 이렇게 신라 고분에서 총 6개의 금관이 출토되었다.
천마총 금관
1973년에 경주 무덤 중 가장 큰 황남대총을 발굴하게 되었다. 쌍분으로 이루어진 무덤으로 국내 고분 중 가장 큰 규모 길이 120M, 높이 약 23M 였다.
멀쩡한 고분을 발굴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시험삼아 앞쪽의 155호분 작은것을 시험발굴 후 황남대총을 발굴하기로 하고 약 8개월에 걸쳐 155호분을 발굴했는데 그곳에서 금관이 나왔다. 그것이 천마총 금관이다.
번호를 붙여 관리되던 155개의 신라무덤
황남대총 금관
황남대총은 중장비 사용이 불가능한 발굴이었고 수작업으로 무려 1600톤의 흙을 팠다. 이렇게 총 2년 6개월이 소요된 황남대총 발굴에 인원이 워낙 많이 들어가 발굴 후 이들을 해체하지 않고 만든 기관이 국립문화재연구소이다.
황남대총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수려한 디테일과 섬세한 세공, 굽은 옥으로 장식해 한층 돋보이는 화려함과 동시에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는 완벽한 형태로 함께 출토되었다. 금제 허리띠에 매달린 13개의 띠드리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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