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군 글로스텨셔 부대는 140여 번의 전투를 치렀는데 그 중에서 설마리 전투(임진강 전투, 1951년 4월 22일~25일)는 단순한 고지 쟁탈전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한 공방전 중 하나로 기록된다. 전쟁 포로의 회고록에는 그당시 영국군이 가지고 있던 총알 수보다 중공군의 수가 더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1951년 봄 당시 한반도 전황과 중공군의 전략, 그리고 유엔군의 대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설마리 전투 배경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1951년 4월까지 한국전쟁은 극단적인 밀고 당기기의 반복이었다.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남침 → 서울 함락
-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 서울 수복, 북진 개시
-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 개입 → 유엔군 평양 철수
- 1951년 1월 4일: 서울 재점령당함 → 유엔군 후퇴
- 1951년 3월 14일: 유엔군 반격 → 서울 재탈환
- 1951년 4월 22일: 중공군 제5차 공세 개시 → 설마리 전투
🔥 1951년 3~4월: 리지웨이의 반격과 중공군의 제5차 공세
1951년 2월,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고,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매튜 리지웨이(Matthew Ridgway)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리지웨이는 병력을 재정비한 뒤, "선더볼트 작전"(1월 25일)과 "래틀스네이크 작전"(3월 초) 등을 통해 다시 서울을 탈환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은 대규모 공세(제5차 공세)를 감행하여 임진강을 돌파하고 서울을 재점령하려 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유엔군은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영국군 29보병여단 소속 글로스터 대대는 설마리 일대에서 핵심 방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글로스터 대대는 약 7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임진강을 따라 위치한 솔마리(현 설마리) 고지를 방어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약 3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전방에서 압박했고, 글로스터 대대는 사실상 포위된 상태에서 절망적인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1951년 임진강 전투: 영국군의 희생과 저항
1951년 봄, 중국군 제63군 소속 3개 사단이 서울을 향해 진격하며 적성-연천 지역으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들의 진입로를 차단하기 위해 영국군 제29여단이 임진강 일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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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투의 진행
① 중공군의 전면 공세 (4월 22일~23일 밤)
4월 22일 밤,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글로스터 대대는 초반에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여 중공군의 진격을 늦추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파도처럼 밀려왔고, 영국군은 점점 더 깊숙이 포위되기 시작했다.
🔹 중공군 주요 전술
- 야간 공격: 어둠을 이용한 기습 공격
- 침묵 이동: 차량, 무전기 없이 조용히 이동해 포위 효과 극대화
- 파상공격: 끊임없는 병력 투입으로 방어선 붕괴 유도
- 심리전: 포위된 병사들에게 항복을 유도하는 전술
② 고립된 글로스터 대대 (4월 24일)
4월 24일, 중공군은 본격적으로 포위망을 좁혀 갔고, 유엔군의 지원은 점점 어려워졌다. 글로스터 대대의 지휘관 칸 중령은 병사들에게 끝까지 저항할 것을 지시하며 사기를 북돋았다. 그는 무전으로 상급 부대와 연락을 시도하며 증원 요청을 했지만, 지원군이 도착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깨닫고 병사들에게 사력을 다해 싸우도록 독려했다. 병력과 탄약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영국군은 최후까지 저항하며 중공군의 전진을 늦추었다.
③ 전투 결과
4월 25일, 중공군이 마지막 총공세를 감행하자 글로스터 대대는 사실상 전멸 상태에 이르렀다. 카니 중령은 부상당한 병사들을 끝까지 보호하려 했으며, 일부 병사들은 백병전을 벌이며 결사항전을 이어갔다. 결국, 소수의 병사들만이 탈출에 성공했으며, 카니 중령을 포함한 대다수 병력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 영국군 피해
- 전사: 59명
- 포로: 526명 (부상병 180명 포함, 포로 수용소에서 34명 사망)
🔹 중공군 피해
- 수천 명 사상 (정확한 집계 불가)
3️⃣ 설마리 전투의 의의와 유산
① 영국군의 영웅적인 저항
글로스터 대대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우며 중공군의 공격을 지연시켰고, 이를 통해 후방의 유엔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서울을 사수할수 있었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중공군은 더욱 빠르게 서울을 위협할 수 있었을 것이다.
② 국제적인 평가: "글로스터 대대의 희생(Glorious Glosters)"
설마리 전투 이후, 영국에서는 글로스터 대대의 용맹한 저항을 기리며 ‘Glorious Glosters(영광의 글로스터 대대)’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영국과 한국에서 이들을 기리는 기념 행사가 지속되고 있으며, 영국군 참전용사들은 지금도 한국을 방문하여 이 전투를 회상하곤 한다.
③ 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투
설마리 전투는 단순한 방어전이 아니라,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글로스터 대대의 저항으로 인해 유엔군은 방어선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고, 결국 중공군의 공세는 서울을 점령하는 데 실패하게 되었다.
4️⃣ 결론: 역사에 남은 용기와 희생
설마리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가장 극적이고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억된다. 영국 글로스터 대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우며 유엔군의 방어를 위해 희생을 감수했다. 비록 대부분의 병력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지만, 그들의 용기는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으며, 지금도 한국과 영국에서 깊이 기려지고 있다. 이 전투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최후까지 싸운 용기와 희생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 즉, 설마리 전투는 중공군이 서울을 다시 빼앗기 위해 벌인 5차 공세의 핵심 전투였으며, 영국군 글로스터셔 연대가 이 공세를 3일 동안 막아낸 덕분에 유엔군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
✍️ 결론
설마리 전투는 영국군의 영웅적인 저항과 압도적인 병력의 중공군이 맞붙은 처절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이 3일 동안 중공군을 저지했기 때문에 유엔군은 서울 방어를 준비할 시간을 벌었고, 전선을 안정화할 수 있었다.
이 전투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전략적 승리로 평가되며, 영국군 글로스터셔 연대는 설마리 전투 종료 12일 후 가장 용감한 부대라는 찬사와 함께 생존 병력에게 미 대통력 부대표창 수훈을 받았고 "글로스터의 영웅들"로 불리게 되었다.
글로스터셔 연대 역사와 칸 중령 활약
한국전쟁에서 영국군의 가장 용맹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임진강 전투(1951년 4월 22~25일)**이다. 이 전투에서 **영국 글로스터셔 연대(Gloucestershire Regiment)**는 중공군의 엄청난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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