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조선을 짓밟은 자들을 그대로 둘 순 없다!"
1926년 12월 28일, 한 청년이 폭탄과 권총을 들고 동양척식주식회사로 향했다. 그는 조국을 수탈하는 일본의 심장부를 공격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 청년이 바로 **나석주(羅錫疇)**였다.
🏅 나석주는 누구인가?
1. 출생과 성장
- 출생: 1892년 황해도 재령 출생
- 배경: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나라 잃은 현실 속에서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 청년기: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분개하여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2. 독립운동의 시작
- 1910년대 후반, 중국에서 독립운동 단체들과 접촉하며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
- 1920년대 초,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항일 투쟁을 시작했다.
- 의열단은 폭탄 투척과 암살을 통해 일제의 주요 기관을 공격하는 무력 투쟁을 전개했다.
- 나석주는 철저한 훈련을 받은 후, 조선으로의 잠입을 결정했다.
🏅 나석주의 의거 준비 과정
- 의거 계획: 나석주는 상하이에서 의열단원들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며 목표를 선정했다.
- 훈련 및 무기 확보: 상하이에서 폭탄 제작법을 배우고, 권총 사격 훈련을 받았다.
- 조선으로의 잠입: 변장 후, 비밀리에 경성으로 이동하여 거사를 준비했다.
- 목표 선정: 일본의 경제 착취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총독부 식산은행을 목표로 삼았다.
🏅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의거
1. 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공격했는가?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이 조선인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고 일본인들에게 나눠주는 대표적인 수탈 기관이었다. 조선 경제를 붕괴시키고 농민을 빈곤하게 만든 주범이었기에, 나석주는 이를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2. 의거 실행 (1926년 12월 28일)
- 상하이에서 폭탄과 권총을 준비한 후 조선으로 잠입
- 경성(서울)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본사로 들어가 폭탄을 투척
- 이후 조선총독부 식산은행으로 이동하여 추가 공격을 시도
3. 최후의 순간
- 폭탄이 완전히 터지지 않아 일본 경찰과 총격전 발생
- 치열한 교전 끝에 탄환이 떨어지자 스스로 권총으로 자결
- "나는 조선을 위해 죽는다!"는 외침을 남기며 순국
✔️ 당시 신문 보도 및 일본의 대응
1. 조선과 일본의 신문 반응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은 나석주의 의거를 간략히 보도했으나, 검열로 인해 자세한 내용은 포함하지 못했다.
- 일본 신문들은 이를 "테러 행위"로 규정하며 조선 내 독립운동 세력의 탄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2. 일본의 대응
- 치안 강화: 조선 내 경찰력을 증강하고, 의열단 관련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 의열단 탄압: 이후 의열단원들을 색출하기 위해 조선과 만주 지역에서 집중적인 감시와 체포 작전을 펼쳤다.
- 언론 통제: 독립운동 관련 보도를 철저히 검열하고, 조선 내 애국적인 움직임을 억제했다.
📢 나석주의 의거 이후, 일본의 탄압과 조선의 변화
- 나석주의 의거 이후 일본은 조선 내 감시와 탄압을 강화했다.
- 독립운동 조직인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이 더욱 강력한 무장 투쟁을 결의했다.
- 일본의 경제 수탈이 강화되면서 산미증식계획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고, 조선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 이에 맞서 조선인들은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전개하며 일본의 착취에 저항했다.
반응형
'아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마리 전투 = 임진강 전투 (0) | 2025.02.19 |
---|---|
한국 젓가락이 금속(쇠)로 만들어진 이유 (0) | 2025.02.18 |
국채보상운동,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유 (0) | 2025.02.17 |
💰 세계가 놀란 금모으기 운동, 처음이 아니었다! (0) | 2025.02.17 |
용산 역사 (0) | 2025.02.17 |